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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으로 본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by 작도쓰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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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기적의 승리!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영화 <명량>을 통해 "명량해전"의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적어보고자 합니다. 

영화 <명량>

 

1. 영화 소개

2014년 개봉한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한국영화입니다. 

조선 선조 때인 1597년, 조선은 오랜 전쟁으로 힘이 약해졌고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군에 의해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누명으로 파면당했던 이순신 장군(최민식)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지만 남아 있던 배 12척을 가지고 일본과 맞서 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은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들은 두려움이 가득했고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 또 마지막 남았던 거북선마저 불에 타고 맙니다. 반면 왜군은 뛰어난 지략을 지닌 용병 구루지마(류승룡)가 330척에 달하는 배를 몰고 오면서 모두가 패배를 직감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명량의 좁은 물길과 조류를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공격하고 그들은 좁고 거친 물살에 갇힌 채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패하고 맙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은 서해 바다를 지키고 전쟁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12척의 조선 vs 330척의 왜군 역사를 바꾼 위대한 전쟁으로 승리를 이끌었던 이순신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 <명량>의 배경스토리입니다. 

 

 

2. 명량 해전이란

1597년 9월 16일에 명량수로를 통해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을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요격하여 패퇴시킨 전투입니다. 


15칠천량전투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일본은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였습니다. 이들은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수륙병진작전을 계획하고 해로를 따라 서해로 북상하기 위해 경상도에 함선 330여척을 집결시켰습니다. 명량수로는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 조수간만 시 유속이 빨라 물길에 익숙한 사공이 아니면 통과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칠천량해전에서 타격을 입은 후 다시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잔존 12척을 모아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서해안 진출을 막기 위해 명량수로를 차단하려 하였습니다. 조수간만이 바뀔 때 명량수로의 조수가 역류하므로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수군의 이동 속도가 저하되면 일본의 진로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한 것입니다. 

일본수군의 대함대가 도착하자 조선수군은 벽파진의 진영을 명량수로 서쪽으로 이동시키고 전투에 대비하여 마침내 9월 16일 일본 수군의 함대가 나타나자 조선군은 수로의 서쪽 출구를 차단하면서 일본수군을 요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함선들은 수로에 진입하였는데 수로가 좁아 함대를 전개하지 못하고 종대대형으로 통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도 함대가 명량수로를 지나 서쪽 출구에 도착할 때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조수가 역류하였습니다. 역류에 말린 일본 함선의 진격 속도가 늦어지자 조선군 판옥전선들이 산개하여 일본함대에 돌격하였습니다.

조선수군은 사격하여 일본 군함의 선체를 파괴하고 화살을 퍼부어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조선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함대는 급류에 휩쓸려 서로 충돌하여 혼란에 빠졌으며 조선 함선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선박 31척이 격침되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일본군의 후속 함대는 수로 진입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으며,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서해안 북상과 수륙양면작전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3. 이순신 장군의 기념비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영웅이며, 뛰어난 군사 작전으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습니다.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 대첩, 당포 해전  모든 해전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하였으나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군사와 백성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고 지금까지 불멸의 이순신으로 기억되기에 우리나라 곳곳에 장군의 기념비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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